얼마 전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감독 원신연)’는 1920년 중국 지린성에 있는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지략을 펼쳐 일본군과의 격전 끝에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는 봉오동 전투로 가는 갖가지 고난의 기록이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투지로 점철되어 있다. 종이를 접어놓은 듯한 날선 산세를 타고 무섭게 내달리면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는 독립군들의 모습은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그리고 귓전을 울리는 그들의 대화 속에 유난히 튀는 지역 사투리들이 이들의 나고 자란 고향을 알려준다. 극중 독립군 황해철의 말대로 “어제 농사짓던 인물이 오늘 독립군이 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나라를 지키고자 모였다.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이어져 왔다.
출처 : 영화 ‘봉오동 전투’
의병, 흰 옷 속에 애국을 품다
의병이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정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웠던 민간인 병사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주변 강대국들에게서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그때마다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일제에 강점된 뒤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항일의병운동 을미 을사정미 의병
의병이 가장 크게 일어났던 때는 조선 임진왜란, 병자호란 시기와 한말(대한제국)이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서 일어난 임진의병의 수는 관군을 능가했으며 관군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전 계층이었는데, 농민이 주력군이었고 의병장은 대개 전직관료·유학자들이었다. 의병은 향촌공동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봉기한 부대였다.
한말에는 일제 침략에 맞서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을미의병 항쟁은 갑오개혁 이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면서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기치로 일어났다. 을사의병 항쟁은 러일 전쟁으로 국토를 유린당하고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하면서 국권 회복을 목표로 일어났다. 정미의병 항쟁은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되면서 국권 수호를 위해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항일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을미의병’
조선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인 을미의병은 동학농민운동에 뒤이은 임진왜란 이래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의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을미의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에 대하여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면서 일어났다. 일제는 전쟁을 구실로 서울에 군사를 파견하여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내세워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어 그들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왕비를 시해하고 우리의 고유 풍속을 훼손하는 단발령을 내림으로써 을미의병 투쟁이 시작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양평의 묘역’
의병이 가장 크게 일어났던 때는 조선 임진왜란, 병자호란 시기와 한말(대한제국)이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서 일어난 임진의병의 수는 관군을 능가했으며 관군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전 계층이었는데, 농민이 주력군이었고 1896년 1월 하순 춘천 유생 이소응(李昭應)은 춘천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봉기하였다. 이소응은 춘천을 점령하고 친일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한 다음 서울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가평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였다. 강릉에서는 민용호(閔龍鎬)가 원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으고 강원도 지역의 산포수들을 규합하여 영동구군창의진을 편성하였다. 민용호는 일제의 보급기지인 원산을 점령하고자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평안도와 함경도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류인석은 각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화서학파의 문인과 제자들을 영월에 모아 4,000여 명의 연합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류인석은 의병부대를 인솔하여 서울탈환을 목표로 제천과 충주를 점령하고 친일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였다. 충주성 점령 이후 각처에서 합류한 의병부대와 함께 류인석은 일본군과 15일간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다 충주성을 뺏기고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제천마저 내어준 류인석은 평안도지역으로 이동해 의병을 모아 재기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 장기적인 항전 준비를 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산청지역에서 곽종석(郭鍾錫) 등 2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1896년 1월 17일 안동부를 점령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許蔿)의병장이 의병을 모아 3월 23일 봉기하고 대구를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해산하였다. 전라도에서는 장성의 기우만(奇宇萬) 의병장이 3월 하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진이라 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의병의 날’을 제정하여 그 뜻을 기리다
국가 환난을 극복하고자 각 지역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수없이 많았다. 양반 유생에서부터 농민, 승려, 사병, 화적, 광부 등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에 국가 위기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의병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 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취지를 담아 ‘의병의 날’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1982년 10월 19일 안호상 의병기념사업회장과 박순천 씨등은 4월 22일을 '의병의 날'로 정해 달라고 국회 등에 청원했다. 이들은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과 때맞춰 외세항쟁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의병의 날' 제정이 필요하다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홍의장군 곽재우가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의 효시가 됐던 4월 22일을 '의병의 날'로 정하자고 건의했다.
2008년 8월 의령군수 등 1만 5586명이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청원, 2010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임진왜란 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1592년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선정하였다. 이후 의병의 날은 2010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매년 6월 1일로 지정되어 현재 9회를 맞이하였다. 올해는 경북 영덕의 신돌석 장군 유적지 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양평의 묘역’
민중의 손끝에서 쓰여 지는 역사
우리나라는 민주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더불어 주목할 만한 가시적인 기술혁신성장을 이뤄가고 있다. 성장 이면에 드리워진 사회의 그림자를 주시하면서 사회발전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도 놓치지 않고 있다. 국민적인 의견을 모아 해결하는 사회문제의 솔루션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애국 유전자가 면면히 살아있는 대한민국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고지 선점을 놓고 벌어지는 세계의 각축전 속에서 그래도 믿을 것은 민중이요, 국민의 힘과 의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침내 획득한 열매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은 세상의 가치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