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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간호]
문화가 깃든 우리 지역 이야기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마을,

전쟁이 낳은 마을

THEMA_ZONE2019.8월호

전쟁은 많은 사람들을 흩어 놓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시간동안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붙일 곳을 찾아 이동했다.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사람들은 새로운 곳으로 모였다.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마을, 전쟁이 낳은 마을들이 있다.

전주 한옥마을 동쪽에 위치한 자만마을. 6·25 전쟁 당시 승암산 자락에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자만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지칭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의 탄생지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달동네에 현재는 83가구 155명 정도가 살고 있다. 작은 마을이기에 30분 정도면 마을을 모두 둘러볼 수 있으며, 높은 언덕에 있어 한옥마을의 전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2012년 자만마을 공동체 대표 권경섭씨와 청년예술가들, 마을 주민들이 함께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57년 성북구에 피난민 정착촌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1959년 유솜(USOM)의 원조로 주택이 들어선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후로 무허가 건축물들이 생기면서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철거가 계속되면서 서민들의 주택사정은 악화되어 갔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남아 있는 마을이 성북구의 장수마을과 북정마을이다, 장수마을은 2004년 전면철거 대신 보존형 대안개발을 선택하여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다. 북정마을은 19세기 중엽 형성되어 6·25전쟁을 거치면서 도시노동자들의 마을이 되었다. 1970~8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많은 마을들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성북구의 장수마을과 북정마을은 근대 서민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마을로 꼽히고 있다.

속초시는 6·25이전에는 동해안의 포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항구도시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속초시 청호동에는 함경도 실향민들의 마을 아바이마을이 있다. 청호동은 모래사장 위에 집을 짓기도 어렵고, 식수 확보도 어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움막형태의 집들이 들어서면서 신포마을, 홍원마을, 앵고치마을, 이원마을 등 같은 고향 출신 피난민들끼리 집단촌을 이루게 됐다. 함경도 사투리로 나이 많은 남성을 뜻하는 아바이라는 마을 이름은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산가족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아바이마을은 통일염원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특히 2000년에 방영된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늘어났다. 피난으로 형성된 마을이 지금은 국민적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아미동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었다. 광복 후에는 귀향한 사람들이 부산을 찾았고, 6·25 전쟁 때는 대규모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초기에는 시내 주변에서 생활이 가능했으나, 휴전 무렵 국제 시장과 보수천 주변에 살던 피난민들이 갈 곳을 잃고 아미동 공동묘지지역으로 가게 된다. 경사가 급하여 주거 공간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피난민들끼리 함께 살아야한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피난민들은 묘지위에 천막을 치고 집을 만들어 정착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판잣집, 루핑집, 슬레이트집으로 가옥양식이 변화했다. 하지만 여전히 곳곳에 쓰인 돌에 글자와 그림이 남겨져 있다. 무덤에 쓰는 상석과 비석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죽은 자들의 공간이었던 아미동은 산 자의 공간으로 변화되어 세월의 흔적을 안은 채로 여전히 남아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에는 청춘발산마을이 있다.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50년대에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1970년대에 전남방직 공장이 가까운 곳에 건설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90년대 이후로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마을이 쇠락해 갔으나 2014년 ‘청춘발산마을’을 시작으로 마을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지역재생산업의 일환으로 발산마을을 문화와 예술, 청춘이 함께하는 창조문화마을로 변모시키고자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합심한 결과 ‘발산창조문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물론 지역 작가들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피난민의 마을이 변화하고 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낙동강변까지 국군이 밀려났으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황해도 장연, 송화, 옹진 등의 출신 피난민들이 진도에 700여 가구가 배당되었다. 그 중 송화 출신을 중심으로 한 110가구가 금골산 곁에 안농수용소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이 지금의 군내면 안동리다. 정부에서 땅과 집을 지을 자재, 농토로 쓸 갯벌 땅을 배정해주기는 했으나, 이 땅은 비좁고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산 중턱을 깎아 택지를 3단으로 비좁게 만들었기 때문에 안동마을 사람들은 허름한 흙집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허름하고 낙후되었던 안농마을은 2013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시범 농촌마을 리모델링사업 마을로 선정되어 2015년 7월 초 리모델링 사업이 완공되었다. 농촌재능나눔 공모사업에도 선정되어 마을의 주민들이 농어촌 발전에 기여하고 도통연대를 활성화 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수암골은 우암산 서쪽자락에 있는 청주의 달동네다. 6·25전쟁 이후 울산 23육군병원 앞에 천막에서 살던 피난민들이 청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형성 당시에 지어진 가옥 양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주택 개량화 사업으로 담과 골목 바닥은 보수 작업이 진행됐지만 주택의 모습은 그대로이다. 하지만 2007년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홍원 화백을 비롯한 충북 민예총 전통미술 위원회 회원 작가, 서원대, 청주대 학생 등이 ‘추억의 골목 여행’이라는 주제로 벽화 작업을 수행했다. 골목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동네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등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쓰이면서 마을을 찾는 발길이 점점 더 늘어났다. 30분 정도의 시간만 소요하면 마을의 벽화를 다 돌아볼 수 있는 아담하고 정다운 마을이다.

감천동은 바다와 가까워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부산 사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미산과 천마산 사이의 기슭에 있다.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 부산 국제시장과 보수천 주변의 피난민들이 판잣집 철거와 화재사건으로 인해 감천 2동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형성된 마을이 바로 감천 문화마을이다. 감천 문화마을은 대극도 신앙촌 혹은 태극도 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1955년부터 유입된 태극도 교도들이 마을 형성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2009년 마을 미술 프로젝트 ‘꿈꾸는 부산의 마추픽추’, 2010년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사업을 거치면서 감천 문화마을은 부산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특히 이 마을의 도시재생사업 사례는 해외에서도 벤치마킹할 정도로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전쟁은 사람들을 흩어놓았으나, 사람들은 장소를 옮겨 다시 모였다. 어느 시대, 어떤 사건도 인간들을 완전히 흩어놓지는 못했다. 삶에 대한 의지로 사람들은 모였고, 마을을 이뤘고, 살아갔다. 못 사는 이들이 모인 마을은 필연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었으나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들을 보면 전쟁의 흔적과 동시에 생의 의지를 체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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