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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호]
문화가 깃든 우리 지역 이야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지역인물

IN_CULTURE2019.9월호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반추하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한글날을 목전에 두고 다시 읽어보는 훈민정음 서문은 짜릿한 감동이 있다.
이 글을 읊조리노라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어 속앓이를 하는 한 여인이 눈에 아른거리기도 하고,
뚜렷한 기록이 없어 눈앞에서 땅뙈기를 뺏기고 만 농부의 마음이 만져지기도 한다.
한글의 탄생은 이들의 그늘을 거두어 주었다.
그리고 비로소 ‘한글의 탄생’을 매개로 한 연결고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새로이 조명되고 있는 한글창제의 또 다른 인물
한글창제에는 많은 인물들이 관여되어 있다. 그 중 학계에서 한글창제의 숨은 공신으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인물로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 공주가 있다.

세종대왕상

1443년 12월 30일, 세종대왕은 역사에 길이 빛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고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되어있고 창제 이후의 일들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베일에 감춰진 한글 창제와 관한 기록 하나가 실마리를 풀어준다. 바로 죽산 안 씨 일가의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이다.
정의 공주는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안맹담(安孟聃)과 혼인했는데, 공주의 시댁인 안 씨 족보에 정의 공주와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것이다. 이 기록은 학계의 주목을 끌었고, 한쪽에서는 이 기록을 한글 창제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다.

족보

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내용을 보면 “세종이 우리말이 문자로 (중국과) 상통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 훈민정음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다는 것에 대해 아직 연구가 끝나지 못해 여러 대군(大君)을 시켜 (이 문제를) 풀게 했으나 모두 미치지 못하고 공주에게 내려 보냈다. 공주가 즉시 이를 해결해 바치니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노비 수백 명을 내려 주었다” 고 전한다.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담아

음식디미방 / 이미지 출처 : 경북대학교

한글요리책을 만든 의현당 장계향은 선조 3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대학자였던 아버지 장흥효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에 조예가 깊고 품성이 어질었다. 양란 이후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하며 식품의 과학적 조리법을 기록했다.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후대를 위해 책을 저술했고 후세의 민초들을 구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훈맹정음 / 이미지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맹인을 위한 한글 길잡이 역할을 한 송암 박두성 선생은 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졸업하고 1913년 제생원 맹아부에서 맹교육을 시작했다. 제생원의 조선어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조선어 교육 폐지를 무력화했고 한글점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1923년 제자들과 함께 3.2점자를 창안하였다. 이후 개선을 거듭하여 <훈맹정음>을 창안하고 점자도서 개발에 헌신했다.
한글의 발전을 견인하는 신(新) 집현전 학자들
글꼴장인이라 불리는 최정호 선생은 뛰어난 글씨 쓰기와 그림 실력으로 인쇄 미술을 권유받아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완성도 높은 활자를 보며 인쇄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글자 형태 자체가 아름다워야 좋은 인쇄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1957년의 ‘동아출판사체’를 시작으로 명조체와 고딕체, 굴림체, 그래픽체, 공작체 등 꾸준히 원도활자를 제작하여 한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의 큰 획을 그었다.
한글학자 눈뫼 허웅 선생은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의 영향을 받아 국어공부를 시작했고 1947년부터 1984년까지 부산대, 연세대, 서울대 등의 교수로 재임하며 수십 권의 국어학 저서를 저술했다. 후학들은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국어학의 주춧돌을 깔았고, 외솔 최현배 선생이 그 위에 집을 지었으며 눈뫼 허웅 선생이 그 집을 마무리했다”고 표현한다.
또한, 한글지킴이 이수열 선생은 국어학자로, 현재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이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본말의 잔재를 고치고 ‘바른말 운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빨간펜으로 주요 언론사를 포함한 여러 기관의 기사와 사설에 대한 조언을 보내는 등, 만 9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지키는 선봉장이다.
우리말 순화에 앞장선 김수업 선생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과 동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를 거치며 40여 편의 논문과 1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국립국어원 국어심의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우리말 순화에 힘썼고 진주문화연구소를 세워 지역문화를 살리는 데 헌신했다.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한글이 세계로 향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지구촌을 품다
이제 한글은 문자로서의 가치를 넘어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1989년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이 제정되어 인도, 튀니지, 중국, 페루 등 세계 곳곳의 단체에 문맹 퇴치의 공로로 세종대왕상이 수여됐다. 이는 한글이 배우기가 쉬워 문맹률을 낮추는데 큰 기여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세종대왕상 시상식 장면 / 이미지 출처 : 우리말의 수수께끼

특히, 말은 있어도 고유한 문자가 없는 지구촌의 여러 종족들이 한글을 써보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나, 태국의 라후족, 네팔 체팡족, 남태평양군도 파푸아 족 등이 그 예이다. 시도 중이거나 이미 정착 단계를 밟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한글이 그만큼 여러 언어를 표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한글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 하였으며, <대지>의 작가 펄벅은 한글을 가리켜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면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 칭송했다. 또한, 시카고 대학의 매콜리 교수는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 10월 9일이 되면 꼭 한국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오늘 날 한글에 쏟아진 관심과 칭송은 한글을 만들고, 가꾸고, 지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가능했음을 깨달으면서 사진 속의 그들을 다시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