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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2019년 9월호]
문화가 깃든 우리 지역 이야기

문화에 정보를 입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THEMA_ZONE2019.9월호

역사 속 인물들에게는 각각 나름의 이야기가 있듯이, 유적지나 관광지와 같은 특정한 장소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군상이 녹아있다. 여기 여섯 명의 인물과 특별한 장소를 통해 역사를 읽어보자.
1. 행주산성_권율
경기도 고양시의 행주산성은 남쪽으로 한강과 창릉천이 감싸고 험한 절벽이 있다. 그리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적의 위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적을 방어하는 데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던 것이다.

행주산성 행주대첩 /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임진왜란 당시, 수원 독성산성 전투에서 1만 여명의 왜군을 크게 물리친 권율 장군은 여기 한양을 되찾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이동해 기회를 노렸다. 방어를 위해 흙으로 쌓은 토성과 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쳤던 행주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는 벌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될 정도로 패배의 연속이었던 기세에서 ‘행주대첩’이라 명명된 이 전투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곳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은 2,300명의 백성과 함께 3만 여명의 왜군을 물리치면서 왜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결국 왜군들은 한양을 버리고 부산으로 퇴각하게 되었고 이는 임진왜란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 권율 동상 /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2. 표충사_조헌

표충사 전경 /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충북 옥천의 표충사는 임진왜란 최초로 호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선 중기 문신 조헌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충청북도 시도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될 만큼 지역을 위한 조헌 선생의 헌신을 기리고 있는 곳이다.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들이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했고, 홍성 지방으로 옮겨가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그리고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인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의 전과를 세웠다. 그러나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조헌의 의병군은 점점 힘을 잃어, 금산의 왜군에게 약점을 공략 당했다. 결국 조헌과 7백 의병들은 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전멸했지만, 왜군의 점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우리나라는 호남 방어의 근거지인 금산을 회복할 수 있었다.
  study_임진왜란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을 말한다.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조선을 상대로 기습을 감행했다. 전쟁 초기에 잇따른 패배로 나라 전체가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앞서 언급한 조헌과 같은 의병들 덕분에 우리나라는 반격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의병의 활약이 커지고 있을 때 3대 대첩 중 하나로 불리는 행주대첩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났다. 권율 장군과 백성들의 고투, 그리고 행주치마의 유래는 지금까지도 널리 기억되고 있는 이야기다.
3. 도산서원_이황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과 유림이 세운 곳이다. 선비퇴계 이황의 재직 시절, 사화로 인해 정계가 흉흉했다. 기묘사화로 인해 이황의 처가인 권씨 가문의 여러 사람이 죽고, 이황은 춘추관기사관에 발탁되었지만 임명되지 못했다.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가를 둘러싼 양대 외척 세력이 권력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결국 을사사화로 여러 선비들이 희생되고 이황 또한 을사사화를 주도한 이기(李芑)의 계략으로 인해 관직이 박탈되었다.

안동 도산서원 현판

안동 도산서원 홍의재 전면

결국 그는 중앙 정계를 벗어나 지방에서 인재를 육성하고자 했다. 안동으로 내려온 이황은 인재들을 통해 중앙의 정치 질서를 바꾸고자 1559년(명종 14)에는 도산서당을 짓고 강학에 힘썼다. 한편 신진학자인 기대승 과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논변하는 편지를 보내며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다. 많은 학자를 양성하고 지방으로부터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룩하고자 했던 이황의 노력은 후대 사림파의 등장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다.
  study_을사사화
을사사화는 1545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으로 일어난 사화이다. 인종이 즉위한지 1년도 안되어 죽고 명종이 즉위한 후, 문정왕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에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이 참변을 당하게 된 사건이다. 명종의 세력인 이른바, 소윤은 윤원형을 필두로 인종 때 권력을 잡았던 인종세력인 대윤, 즉 인종의 외삼촌 윤임을 몰아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을사사화의 피해자 중에는 앞서 소개한 퇴계 이황의 일가도 있었다.
4. 박팽년유허비
박팽년유허비는 대전 가양동에서 만날 수 있다.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 8호로 지정되었으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그의 충성심을 추모하기 위해 집터에 세워둔 것이다. 박팽년은 세종 재위 시절 집현전 학자이자,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그는 과거를 두 번이나 급제하여 우승지를 지냈고, 형조 참판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다 실패했고, 심한 고문 끝에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 박팽년유허비 /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study_사육신
사육신은 1456년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 여섯 명을 지칭한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지칭하는 사육신은 조선 중기 이후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5. 신숙주 선생의 묘
신숙주 선생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함께하여 공적이 많았던 신숙주는 태종부터 성종까지 큰 관직을 두루 지냈다. <해동통감>을 총관하고 <국조오례의>의 검토를 맡았으며 <해동제국기>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에 대해 분석했다. 특히, 수양대군의 서장관을 여러 번 지내면서 험난한 계유정란과 사화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6. 면앙정_송순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만날 수 있는 면양정은 조선 중기의 정자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이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 6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신이었던 송순이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 송순은 1533년(중종28)에 권세를 등지고 전라도 담양에 석림정사와 면앙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송순은 이곳 면앙정에서 시조를 지으며 조선의 가사문학에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선구적으로 발전시켰다. 면앙정은 퇴계 이황을 비롯한 유명인사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던 장소이자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 등의 후학을 길러냈던 정자이다. 면앙정은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