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조금만 들면 들여다보이는 낮은 담, 밀기만 하면 열리는 잠기지 않은 대문. 허울뿐인 집의 경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마을이라는 공간을 마주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내 집과 우리 마을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고 살아왔다. ‘이웃사촌’이라고 이웃을 혈연과 동등하게 바라봤던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마을과 공유했다. 이런 마을을 가장 강하게 결속시킨 것은 마을이 공유하는 믿음, 신앙이었다.
수많은 전쟁 속 마을을 하나로 묶은 마을신앙
아시아 대륙 끝 작은 반도에 사는 우리 민족은 많은 전쟁을 치러왔다.
중국과 바다 건너 일본은 수시로 한반도를 넘보며 국경선을 넘었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 자신을 지켜야 했던 나약한 개인이 의지할 곳은 신앙뿐이었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고, 조선은 유교 국가였지만 그 어떤 종교도 마을 신앙을 누르지 못했다.
언제가 그 시작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이 오래된 마을 신앙은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문화이다.
마을을 지킨 정겨운 수호신, 장승과 성황신
시골 마을 어귀에 서서 반쯤은 화가 났고 또 반쯤은 웃고 있는 커다란 장승은 ‘OO로 OO번 길’과 같은 표지판이 없던 시절, “여기서부터는 OO마을이오”하고 친절히 설명하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정표이기 전에 장승의 본 모습은 마을을 수호하는 마을신이다. 장승은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 밤도 우리 마을이 무사하길 바랐던 마을 주민들의 간절한 마음을 안고 묵묵히 마을을 지켰다. 낮에는 한없이 정겨운 모습으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주었고, 음산한 밤이 되면 밤에 오는 나쁜 것들에게서 마을을 지키기 위해 거대하고 두려운 모습으로 돌변했다.
성황신(서낭신)은 고려시대 중국에서 유입돼 지역사회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방 호족들을 중심으로 널리 성행했다. 성황신을 부르는 지역별 용어가 달랐는데 전라도에서는 당산신, 경상도에서는 골맥이신, 경기도에서는 도당신으로 불리었다. 본디 성과 성 둘레에 파둔 참호를 말하는 성황은 국가나 고을을 방어하는 방어시설에 대한 명칭이었고 성황신은 촌락의 물둑신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황신으로 지역에 연고를 둔 인물을 주로 모셨는데 순천의 김총, 의성의 김홍술 등이 대표적인 성황신이다. 이 성황신을 모신 곳을 성황당(서낭당)이라고 한다.
장승
성황신김총영정 /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한반도 산수갑산을 수호한 민족의 신, 산신과 용신
거대한 생명의 보고, 산.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무를 키우고 동물을 돌보고 마을을 굽어 살피는 산에 아주 당연히 신이 있다고 믿어왔다. 세상 모든 산에는 산신이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한반도에 존재하는 마을신 중 그 수가 가장 많은 것이 이 산신이다. 단군 역시,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산에 좌정했다고 보기에 산신의 일종이라 보기도 한다. 자연신이었던 산신은 후대에 오면서 호랑이 혹은 지역에서 유명한 인물로 바뀌기도 했다.
청동기 시절부터 농사를 지어 온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 물. 이 물을 주관한다 믿어진 수신은 용이다. 바다를 다스리는 신을 용왕님이라 부르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용신은 여러 지역의 신으로 모셔져 다양한 신체로 표현된다. 전라도 지역의 당산제에서 여러 형태의 줄다리기를 하는 건 줄을 용의 형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 마을 어귀 나무를 돌돌 감은 색색의 고운 줄 역시 이 용을 의미한다. 용은 자연의 조화를 맘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 믿어졌기에 농사에 꼭 필요한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는 이 용을 달래는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산신 / 이미지 출처 : 통영시립박물관
용신 / 이미지 출처 : 가회민화박물관
믿음을 넘어 문화가 된 마을신앙
우리 민족의 다양하고 폭넓은 마을신앙은 마을마다 기도하는 주체가 달랐고, 부르는 이름이 달랐지만 존재의 이유는 모두 같았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 모두 그 하나를 기원했다. 단군 이전에도 존재했으리라 추측되는 마을신앙은 수많은 사람의 길고 고된 믿음의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려 이제는 종교적 의미 너머 거대한 문화가 되었다. 마을신앙은 이제 나라를 대표하는 축제가 되고, 민족을 대표하는 명절이 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이 되어 현재로 또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