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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호]
문화가 깃든 우리 지역 이야기


2020년 가장 핫한 키워드 ‘레트로’ 열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역 곳곳에는 근대 문화의 숨결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공간들이 존재합니다. 레트로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명소들과 그곳에 얽힌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나러 떠나볼게요!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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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 가옥 /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우리 민족이 위기와 고난에 처해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어려웠을 때마다 전 재산을 털어 문화재를 지켜낸 분입니다. 전형필 선생님은 1906년 서울 배오개(지금의 종로 4가)에 있는 99칸 한옥에서 전영기의 2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요. 태어나자마자 숙부 전명기의 양자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의 대부호 가문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는 가족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인해 친가·외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간송은 문화재가 외국으로(특히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이미 유출된 문화재도 되찾아왔습니다.

간송이 지켜낸 문화유산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단원 김홍도의 그림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이후 전형필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만들어 어렵게 모은 문화재를 보관했습니다.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이 바로 그 ‘보화각’의 후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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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 가옥 /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등록문화재 제521호이기도 한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은 그의 민족혼이 배어있는 집입니다. 그가 살았던 집은 성북구와 종로구에도 있었는데요, 지금은 둘 다 사라져 버리고 현재까지 이곳이 유일하게 남아있습니다. 이 집은 1890~1900년대에 양부 전명기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통 한옥입니다. 가옥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ㄱ’자 한옥으로, 부엌· 창고 등 일부 변형 외에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70년간 군수 관사로 쓰인 100년 전통 한옥 - 괴산군수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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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수 관사 사랑채 /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괴산군 동부리의 괴산군수 관사는 근대 100년의 풍상을 겪어낸 전통 가옥입니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시간 동안 관사로 사용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괴산읍 중심가는 조선총독부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괴산·연풍·청안을 통합하여 괴산군으로 설정한 이후 형성되었는데요, 동부리 가옥도 그 무렵인 191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가옥 구조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나뉘는데 각기 독립적인 공간이면서 동선을 고려해 유기적으로 배치 되어있습니다.

동부리 가옥은 1950년에 최 씨 성을 가진 부자가 괴산군에 기증한 이후 지금까지 군수 관사로 사용되었습니다. 1995년 지방자치제도 실시에 따라 선출된 민선 괴산군수도 한옥 관사를 썼습니다. 집의 일부를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최근까지 본채(안채)는 관사였습니다. 지어진 지 100년이 된 한옥이 자치단체장의 관사로 이용된 사례는 전국적으로 괴산이 유일한데요. 지역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가끔 수리만 하면 관사로 사용해도 별 무리가 없을 만큼 집이 튼튼하고, 구조가 괜찮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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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수 관사 사랑채 /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동양 최초의 바다 밑 터널, 통영 해저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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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해저 터널 /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경상남도 통영시에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 있습니다. 통영반도 남단과 미륵도 사이의 통영운하를 가로질러 바다 밑으로 건널 수 있게 일제가 1932년에 만든 길입니다. 이 해저터널은 만조 기준으로 수심 13.5m 아래에 건설되었습니다.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 규모의 해저터널 입구에는 ‘용문달양(龍門達陽)’이란 글씨가 씌어있는데요. 터널을 뚫을 당시의 일본인 통영 읍장이 쓴 글인데, '용문을 지나면 밝은 세상이 나온다'라는 뜻입니다.

터널은 지리적으로 '판데목'이라는 곳에 위치합니다. 임진왜란 한산대첩 때 많은 왜군이 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패해 판데목 부근에서 수장됐다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조상의 유해 위로 건너다닐 수 없어서 해저터널을 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시설이 낡아 사람만 다닐 수 있지만, 예전에는 사람과 우마차, 자동차가 모두 다닐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1967년 통영운하 위로 충무교가 놓인 뒤로는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최신 상품을 과시하던 공간, 구 충북산업장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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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충북산업장려관 /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


충청북도 청주시 충북산업장려관은 충청북도에 현존하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힙니다. 2007년 352번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죠. 근대 공업 생산품들을 전시하여 소비를 촉진할 목적으로 건립된 충북산업장려관의 개관 당시 명칭은 ‘충북물산장려관’이었습니다. 1936년 12월 충청북도 도청 신축청사보다 6개월 빠르게 완공되었는데, 도청을 새로 지으면서 물산장려관을 먼저 선보이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롭게 형성된 청주 신시가지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 잡은 충북산업장려관은 양쪽 거리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모서리를 둥글게 하여 주 출입구를 냈습니다. 전체적으로 산뜻하면서 간결한 외관을 보이는 근대 건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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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충북산업장려관 측면 창호 및 배면 전경 /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


충북산업장려관은 해방 후 1957년부터는 충북상공장려관으로 과거 기능을 이어갔으나, 산업이 발달하면서 국가 행정이 주도하는 전시 공간으로서의 성격은 사라졌습니다. 이후,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관 주도로 상품을 과시하는 공간은 필요 없게 되었고 또다시 용도가 바뀌어, 충청북도 도청 민원실과 충청북도 지방경찰청의 사무실 등을 거쳐 도청의 문서고 신세가 되었습니다.

탁배기 한 잔이 건네는 위로, 진천 덕산양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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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양조장 전경 /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TV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덕산양조장은 1925년 은밀히 막걸리를 빚어 파는 집으로 시작했습니다. 일제가 술에 세금을 매기는 근대적 주세법을 도입하면서 사적으로 술을 빚는 관습을 폐지시켰기 때문이죠. 가양주(家釀酒)가 사라지면서 술 빚는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물론 탁배기 한 잔이 건네는 위로는 여전했던 시대였고 시름이 더 많아졌기에 양조장은 번성했습니다.

이 건물은 건축 당시 백두산에서 목재를 가져올 만큼 정성을 기울인 건축물입니다. 양조 과정을 좌우하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왕겨를 채워 넣은 두꺼운 벽체를 세웠고, 천장 판자 위에도 왕겨를 채웠습니다. 자연스러운 환기가 되도록 통풍 구조를 만들고 양조장 앞 화단에는 측백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습니다.

덕산양조장은 한국전쟁 시기 소실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고, 막걸리가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시기에는 10년간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1998년, 3대째 가업을 잇게 된 이규행 씨는 양조장 재개를 결심해 2000년 수리에 들어갔습니다. 70년을 이어온 양조장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양조 시설 부분은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도록 했죠. 2001년부터 재생산에 들어간 덕산양조장의 막걸리는 옛 맛을 잃지 않았고, 금세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막걸리 붐을 타고 덕산 생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알려졌습니다. 덕산막걸리는 그동안 대통령상을 세 차례나 받았음은 물론, 덕산양조장 본체 건물은 2003년 등록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진천에 가면 덕산 생막걸리 한 사발 꼭 맛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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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양조장 내부 및 외부 표석 /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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