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문화가 깃든 우리 지역 이야기
우리나라 곳곳에는 다양한 이름의 마을들이 있고 그 마을 이름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깃들어있습니다. 마을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로는 동물에 대한 것이 가장 많은데요. 동물 유래 지명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건 환상의 동물 ‘용’이랍니다. 그 외에도 여우와 호랑이, 소에 대한 지명도 많지요. 효 사상을 높이 기렸던 전통문화에 따라 어느 지역에서나 효자동, 효자촌을 흔히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자'가 되기를 염원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부자 이야기와 관련된 지명도 많아요. 설화에 따른 지명만큼 역사적인 사건이나 실존 인물에 따른 지명도 많은데요. 오늘 다양한 지명 유래 이야기를 하나씩 소개할게요.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조선 영조 때의 일이에요. 한번은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마을의 소들이 모두 죽어갔어요. 소를 살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다 구해 보았지만, 고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마을 어귀에 소 두 마리가 나타났어요. 마을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마을 사람들은 누구부터 소를 부릴지를 가지고 밤새 의논한 끝에 마침내 순서를 정했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를 부렸어요.
지나친 과로 끝에, 소 두 마리는 밭을 갈다가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어요.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너무 심하게 소를 부린 것을 후회했어요. 그들은 마을 언덕 양지바른 곳에 소들을 잘 묻어주고 자신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다 떠난 그 넋을 진심을 다해 위로해주었죠. 진심이 닿았던 것인지, 이후로 해마다 이 마을에는 풍년이 들어 잘살게 되었어요. 이후 이 마을은 ‘소를 묻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우곡(牛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해요.
이미지출처 : 한국관광공사
옛날 전라남도 고흥 땅의 어느 산골에 가난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어요. 젊은이는 가난했지만 글공부에 열심이었죠. 젊은이가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해에, 섬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말을 듣고 내외는 함께 섬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육지 마을에 일이 있어서 다녀온다고 하고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떠났어요. 부인은 남편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기다림 끝에 도착한 건 남편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뿐이었어요. 그 후 부인은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남편의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았어요.
바다 건너 육지 마을에는 평소 부인을 흠모해온 부잣집 젊은이가 있었어요. 부인 남편의 부고를 들은 젊은이는 섬으로 가 부인에게 구애했죠. 젊은이의 끈질긴 구애에, 부인은 그에게 뒷산에 올라가 ‘음매~’하고 소 소리를 세 번 외쳐달라고 부탁했어요. 부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것으로 착각한 젊은이는 뒷산에 올라 그가 시킨 대로 “음매~ 음매~ 음매~”하고 힘차게 외쳤어요. 그러나 뒷산에서 돌아온 젊은이를 맞아준 건, 목을 매고 죽은 부인의 차디찬 시신뿐이었죠. 이후부터 이 섬은 젊은이의 소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 섬이라 하여 ‘우도(牛島)’라고 불리었다고 해요.
이미지출처 : 지역N문화
옛날 연사리(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에 이돌대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어요. 어느 해, 돌대의 어머니는 병이 들어 앓아누웠어요. 병은 도통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는 별 차도 없이 병석에 누운 채로 몇 년의 세월을 보냈어요. 한겨울 어느 날 어머니는 숭어가 먹고싶다고 아들 돌대에게 말했어요. 돌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숭어를 구하러 갔어요. 온 거제를 뒤져 보았지만 숭어를 구할 수 없자, 배를 타고 통영으로 가기로 했어요.
통영으로 가는 배 위에 갑자기 커다란 숭어가 나타나 갑판 위에서 펄떡거리고 있었어요. 이를 잡으려 돌대는 서둘러 달려갔지만, 이내 숭어는 펄떡거리며 다시 바다로 들어가 버렸어요. 숭어를 놓칠 수 없었던 돌대도 뒤따라 바다로 뛰어들었어요. 잠시의 정적 후, 돌대가 숭어를 손에 쥐고 물속에서 올라왔어요. 돌대의 지극한 효심이 이뤄낸 이 극적인 이야기는 궁궐에까지 전해졌어요. 나라에서는 돌대에게 벼슬을 내리고 그 효심을 기렸어요. 효자 이돌대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그가 살던 마을 이름도 ‘효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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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지금의 세종시 금남면 영대리에 홍개라는 부자가 살았어요. 홍개는 넓은 땅을 갖고 있었죠. 가을 수확 때면 달구지에 싣고 온 곡식으로 수십여 개 광 모두 가득 찼어요. 부자인 홍개네 집에는 매일 같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홍개는 어떻게 하면 손님이 오지 않게 할 수 없을지 고민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노스님이 탁발을 왔어요. 홍개는 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겠는지 물어봤어요. 노스님은 밤에 백마 두 마리가 뛰놀면 백마 목을 잘라 그곳에 묻고 삼 년 후에 파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했어요. 홍개는 스님의 말대로 백마 두 마리의 목을 잘라 묻었어요. 그 후로 정말 손님들이 오지 않았어요. 홍개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며 기뻐했죠. 말머리를 묻은 뒤 손님이 오지 않자 광에 있는 곡식은 줄지 않아 썩어갔고, 쥐 수 십마리가 곡식을 갉아먹었어요. 그런데도 홍개는 ‘곡식은 가을에 또 들어올텐데 무슨 걱정이람!’하며 걱정이 없었어요.
어느덧 3년이 지나, 홍개는 하인과 함께 뒤꼍에 가서 말머리가 묻힌 곳을 파 보았어요. 그러자 백마 두 마리가 힘차게 뛰어나오더니 홍개 집을 서너 바퀴 돌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날로부터 홍개의 집안은 크게 기울어 논밭도 팔고, 쌀도 부족해지고, 하인들도 떠나가고 말았죠. 지금은 홍개가 살던 곳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홍개가 살던 곳이라 하여 그곳을 홍개골이라 불렀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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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왕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로부터 둘째 공주가 태어나자 바르게 크라고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1455)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사람들은 경정공주가 사는 곳을 작은(둘째) 공주가 사는 곳이라 하여 ‘작은 공줏골’이라 불렀어요. ‘작은 공주’를 한자로 바꾸면 ‘소공주(小公主)’인데, 그 지역을 ‘소공주동’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주’자가 빠진 소공동(洞)으로 부르고 있어요.
한편, 선조 16년(1583)에는 이곳에 다시 궁을 화려하게 지어 선조의 셋째 아들 의안군이 머물기도 했어요.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군 장수 우끼다 히데이가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다가, 이후에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남별궁이 되기도 했었지요. 1897년에는 고종이 이 지역에 세 층의 화강암으로 둘레를 두른 환구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기도 했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경정공주가 살던 이곳을 여전히 소공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답니다.